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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 포구 소개 1 **당진시.당진항.당진토지.당진땅.당진부동산.당진개발.당진개발지.

(천영창)마이다스 2014. 9. 21. 21:43

당진포(唐津浦) -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 ** 고대면성산리토지.고대면장항리

당진포는 현재 흔적만 남은 폐항이다. 대호지구 농업종합개발계획에 의하여 1984년 11월에

대호방조제가 완공되어 담수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융성했던 당(唐)나라 문물의 대부분이 이곳 당진포를 통해 들어오고 그 영향을 받아 흥청댔던

옛을 더듬어 생각 할때 상전벽해(桑田碧海)라 아니 할 수없다.

 

 

대호방조제 건너 도비도 농어촌공사 휴양관광단지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영토를 차지하면서 당진포가 포구로서의 기능이 더욱 활발해졌다고

말 할 수있겠다. 그 당시 중국으로 가는 해로는 황해 앞바다를 거쳐 신의주.요동반도.산동현.

문등현 법화사로 해서 다니는 것이었는데 당진포(唐津浦)가 가장 가깝고 안전한 항로 였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 때 태안반도와 당항포(唐港浦-현재의 경기 화성 남양만)로 이원화 되었던

당나라와의 교역 창구를 당진포로 통합*일원화 되었다는 의미도 있다.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를 보면 당진포에 외국인이 처음 닿았다는 문헌적 기록을

볼 수 있는데.백제 자왕 말년에 당나라의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덕물도(德物島-지금의 덕적도)

에 들어와 군대를 주둔 시킨후 당진포로 상륙했다고 한다.

그후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때에 정치적으로 어지럽고 혼란한 틈을 타고 당진포의 해상(海商)을

가장한 수 많은 해적(海敵)들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데 이 무렵 축성된 산성(山城)과 봉수대가 지금도

잔존한다.

당진포 주위에 쌓여진 산성은 당시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고. 봉수대 또한 포구로 배가 들어

오거나 적이 오는 것을 사전 감지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진시내 유일의 진성(鎭城)으로 백제말기에 쌓여진 것으로 보이는 당진포성이 아직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활발한 교역(交易)을 위해 사신숙소 당대(唐垈)를 두었으며. 진흥왕 25년에는 중국

사신이 포구에 배를 대어 놓고 주위의 빼어난 경관에 감탄하여 영랑사를 세웠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최근의 새로운 연구로서 拂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原에서 김성호(金聖昊) 씨는 당진포는 광개토왕이

상륙해 홍성.예산 아산을 거쳐 공주까지 진격한 것으로, 비류백제가 망하고 그의 추종세력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시조가 된 시원지(始原地)가 당진포라고 유추 해석하고 있다.

선조29년 임진왜란때 침입해 온 왜군을 막기 위해 명(明)나라 제독 진린(陳隣)이 지원군을 이끌고 상륙한

지점이 바로 당진포라는 쓰라린 역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

당진포는 조선시대에 들어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인천(당시 제물포)과의 왕래 등 주민의 교통수단으로서,

충청*경기*전남지방의 세곡이 모이는 조세창의 기능을 겸비, 수많은 선박과 사람들의 입출항은 포구를

항상 들뜨게하고 흥청거리게 했다.

 

 

간척지 방조재 내 옛 소금창고 건물

 

당시 포구내엔 내륙지방의 관곡을 모아두었던 해창(海倉)이 있었는데, 당진포가 해창으로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형적으로 서해안 최고의 돌출부라는 조건외에 항로 주변에 섬이 많아 뱃사람들로

부터 일종의 대문같은 안전기항지로 인정 받았기 때문인듯 하다.

이제 당진포는 사라졌다. 대호방조제의 물막이 공사가 끝난 후 육지화된 포구에는 일없는 어선이

부서져고 있고, 어구를 정비해 바다로 나가던 어부들은 모두 타관 객지로 떠났거나 농사를 겸업하던 몇

가구만 촌락에 남아 있다.

 

 

 

방조제 전경

한때 해상을 통한 풍부한 농경문화가 어우러져 포구에 북적이던 뱃사람의 흥겨운 노랫소리를 떠올리며

망연히 지금은 막혀버린 바닷길을 멀리 바라 본다. - 다음 은 송악읍 한진포구 한진항 애기 입니다.

내포문화 (창간호 - 1988년 소개) - 당진향토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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