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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 浦口 소개 2 한진포구-당진시.송악읍한진리.송악읍부곡리.송악읍오곡리.송악읍고대리.송악읍복운리.송악읍중흥리.송악읍토지

(천영창)마이다스 2014. 9. 24. 20:30

한진항(漢津港)**송악읍한진리.한진포구.송악읍부곡리.송악읍복운리.송악읍오곡리.송악읍중흥리.

동국여지승람』홍주(洪州)목 편에 『一目夜地問에 陸陷爲海』라는 기록이 있어 한나루개항(開港)에

얽힌 유래를 알수 있다.

전해오는 말을 들어면 漢津항 앞의 아산만은 조선 초엽까지도 뭍이었는데 얼마후 해일과 홍수로 땅이

씻겨 바다가 된 것이라고 한다. 土亭 이지함이 牙山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저녁에 뜰을 우연히 거닐다가

하늘을 보더니 오늘 밤 자정쯤에 큰 뭉이 지되, 고을의 일부가 바다로 변하면서 사람이 적지아니 축나겠다고

예언하였다.

 

    한진포구에서 본 서해대교 야경

 

곁에 있던 사람들은 구름 한점 없이 별이 총총한 밤 하늘을 바라보며 실소를 하였으나 土亭은 곧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자는 이들이 깨워 상전벽해를 예고 하면서 서둘러 피신 하도록 당부하였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물론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어느듯 자정이 넘었으나 土亭은 한사람이라도 더 건져 보려고

그 일을 쉬지 않았는데, 그때 몇걸음 앞에 웬 허름한 짐꾼 하나가 지게를 지고 가며 혼자말처럼 『딱하다.내

발등의 불은 못보고 남의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려 다니는구나』하고 두런거리는데. 말인즉 土亭더러 들어라는

소리였다. 土亭은 축지법까지 써가면서 그를 붙들려 하였으나 종내 앞지를 수가 없었다.

土亭이 거듭 부러면서 말을 시키려 하자 짐꾼은 마지못해 퉁명스럽게 『정 알고 싶으면 그대나 어서 몸을 비키라.

이 자리가 곧 바다로 변할 곳이니 정작 위태로운 이는 바로 그대다』하였는데, 그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천지를

뒤 집는 소리에 이어 하늘에서 비를 들어부어니, 순식간에 물에 잠기면서 삽날같이 날카로운 큰바위 하나가

저만치에 솟아오르고, 집채만한 바위들이 뒤따라 떠오르는 것이 었다.

그후 土亭이 서있었던 자리 바로 밑에 나루가 생기니 사람들은 큰 나루라하여 大津또는 漢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때 솟아오른 바위는 뒷날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큰 공을 세웠다. 아산만으로 쳐들어오던 왜적들이

안개에 쌓인 그 바위들을 매복중인 조선 수군의 장수선과 병선으로 오인하고 지레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왜적을 몰아 낸 바위라 하여 영웅 바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진을 말할때 『썩어도 준치』하는, 준치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조선 선조 초 개항 된 이래 400여년에

이르는 50년대 후반까지 이고장 최고의 성시를누릴 수 있었던 것은 포구일대에서 잡히는 고기중 가장 많이

잡히고 가장 최상급으로 일컬어지는 준치 때문이다.

준치 맛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당진사람들은 한진의 싱싱하고 감칠맛 나는 준치의 생선맛을 결코 잊지 못한다.

비록 신선도가 사라져 가는 썩은 것일지라도 소금에 절여 놓기만하면 다른 생선처럼 부서지지 않으면서 새롭게

제맛을 돋아 내는 준치의 특성을 이 고장 사람들은 집안 대대로 입맛에익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썩어도 준치』란

말의 유명한 고장 속담을 만들어 냈다.

일제시대 이 고장 토산인 준치와 더불어 예전부터 먹는 사람이나 먹던 귀물 어란(漁卵:숭어 알집을 통채로 간하여

말린것) 과 숭어,삼치를 南進刀)이란 50톤급의 기선으로 일본에 실어 나르는 交易港의 기능을 한진浦는 담당 했으며

1910년대 후반 中船의 고깃배 7~8척을 보유하는 大港으로 발돋움 했으며, 1920년대 들어 해물관리와 인천과의

교역을 관장하던 수산사(현 수협 의 전신) 가 들어섰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6*25직전 『한진 폭동』의 좌*우익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동족상잔의 아픔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충남 최북단에 위치한 관문으로서의 위치가 한진항이라는 지형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잠복되어 있던

좌익의 사람들이 특히 많았는데. 좌익에 의한 10여일간의 격심한 폭동기간 동안 마을이 점령당했으며 지서가

불타올랐고 마을 곳곳에 폭동을 일삼는 대소의 불상사가 비일비재 했다.

이러한 역사의 격랑 에서 한진항은 외지선박이 매일 백여척씩 드나드는 큰 항구의 기틀을 다져나갔으며.

연평도의 조기떼를 몰고 나선 中船10여척이 포구에 정박하는 모습은 주민들이 매일 만나는 정겨운 모습이었고

더욱이 새우 건조장이 생겨 나면서 중국에 마른새우가 대량으로 수출되어 호황을 누렸다.

아울러 인천으로의 교역과 선박의 운송수단이 확대되면서 경인지역과의 물물교환이 성했고 소금전매를 위한

수납창도 생겨 났다.

이에따라 자생적으로 늘어난 30여 가구의 밥 집과 술집, 당시로는 크다고 할수 있는 포구를 중심으로 한70여가구

200여 주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진시장은 당초 준치시장으로 場을 열어 이미 당진읍 시장보다 훨씬 큰 군내

최대의 장으로 발전 했으며 타지역의 5일장에 비해 이곳은 한달 12일장이 섰을 정도로 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한진場은 전국의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베*모시 등 길쌈의 물물교환장 었으며, 도회각처의 정치*경제*문화의

정보를 얻고 전하는 매개場이기도 했다.

 

새로 개관한 심훈 상록 문학관

沈薰의 소설 『상록수』의 무대가 된 마을 漢谷里는 漢津과, 소설의 주인공 박동혁으로 지목되는 그의 장조카 載英이 사는 마을 富谷里에서 따낸 地名임을 알수 있다.

지방민속문화재 제2호 『기지시줄다리기』는 한나루가 터져 많은 생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각종

전염병이 만연되고 대낮에 맹수가 날뛰어 사람을 상하게 하는 등 사회가 흏흉해지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마련된 놀이라 한다. 매윤년마다 3월초에 남부와 북부 지역주민들이 편을 나누어 한판 힘을 겨루어 줄을 당기면서

고을의 온갖 재난이 물러가기를 비는 제전이었다는 줄다리기는 이후 400년간을 민속행사로 이어져 오늘에도

전승 되고 있다.

송산면.송악읍 일대 현대제철과 송산2일반산업단지 전경

 

그러나 오늘날 한진항이 점차 퇴락해 가고 있는것은 내륙에 서해안고속도로등 육로의 발달과 주변 대규모

국가산업단지 등 공업단지와 인천항을 대체할 대규모 당진*평댁항의 개발로 인해 대규모 산업 단지화

되어가고 있다. 이제 옛 어항으로서의 한진항의 명성은 잃었지만 "서해안시대의 개막"이란 구호와 주변

개발로 인해 전국최대의 무역항인 당진*평택항의 개발과 주변 현대체철,동부제철.동국제강,중외제약등

국내굴지의 기업입주와 개발확장으로 인해 더욱더 발전하고 이름을 알리는 한진포구가 되기를 기대한다.

 

참조 : 내포문화 - 內浦文化의 內浦는"바다나 호수가 육지로 휘어들어간 부분"을 말하며 "內浦文化"는 충남의

        서해안을 낀 牙山.唐津.禮山.瑞山.靑陽지방의 문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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